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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기술자 이근안 프로필 정보! (근황 목사 고백 수상 도서)

hugeSTlight 2024. 7. 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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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기술자 이근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근안 경감 경찰로 과거 군사 정권 시절 고문을 통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인물입니다. 자수 이전 10년이 넘는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이근안 가족 역시 말그대로 몰락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영화 남영동 1985 이경영이 연기한 이두한의 모티브 인물로 유명합니다. 또 영화 1987 당시에도 관련 이야기로 이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영동 영화 내용이 자신의 이야기와 조금 다르다며 자서전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이근안 목사 안수를 받으며 신앙 생활도 했지만 결국 면직됩니다.

 

출판기념회 당시 발언과 함께 여러 논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언론의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고문기술자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이근황 근황 소식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목차

1. 고문기술자 이근안

 

2. 이근안 근황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문기술자 이근안

 

  • 1970년 순경 생활 시작
  • 1979년 남민전 사건, 1981년 전노련 사건, 학림 사건
  •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학 간첩 조작 사건, 1986년 반제동맹 사건 피의자 고문 사건
  • 1988년 12월 언론에서 김근태를 취재하다가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 이야기와 함께 알려짐
  • 1988년 12월 24일 김기춘 검찰총장이 고문혐의 적용 후 수사 지시
  • 1988년 12월 27일 우편으로 사표낸 후 도피 생활 (10년 10개월)
  • 1999년 10월 28일 이근안 자수
  • 2000년 9월 징역 7년 대법원 판결
  • 2006년 여주교도소 만기출소

 

잠적했던 당시 불법체포감금죄 죄목으로 수배되었고 공소시효는 1992년 9월까지였습니다. 하지만 공범들이 재판을 받으며 시효가 정지되고 공소시효가 1999년으로 연장됩니다. 그리고 1998년 간첩조작 사건 관련자 재판 회부로 시효가 2013년까지 연장됩니다.

 

함께 일했던 대공분실 경관 8명 중 6명이 2년 이하의 선고를 받자 결국 1999년 10월 21일 성남지청에 자수하며 10년이 넘는 도피생활이 막을 내렸습니다. 도피 생활 중 성경 5회독, 자서전 등 39권의 책을 집필한 기록도 알려집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이근안 도서)

간첩 조작 사건을 자백하는 내용이 포함된 책으로 2013년 발간됐습니다. 출판기념회를 가지기도 하며 심경을 밝혔습니다. 2012년 영화 '남영동 1985' 당사자로 영화를 본 뒤 자신의 실상을 밝히는 것이 매도의 길을 막는 것이라 생각해 집필했다고 합니다.

 

배우 이경영 씨는 고문기술 전문가 이두한을 연기했습니다. 이경영은 촬영 후 그가 직접 영화를 보고 진솔한 사과와 용서를 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근안은 영화를 봤고 한 인터뷰를 통해 관련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직접 영화를 봤는데 사실과 다른 부분이 너무 많다며 자서전을 통해 이야기를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자서전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있었던 일, 도피생활, 기독교를 만난 내용이 쓰여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첩을 잡고 사상범 잡는 것이 애국인 줄 알고 일했으며 애국이 정치 색깔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몰랐다고 밝히며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을 했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근안 프로필

생년월일 1938년 3월 21일로 이근안 나이 86세입니다. (2024년 기준) 키 172cm, 몸무게 90kg로 젊었을 적에 배가 나온 거구였다고 합니다. 종교 개신교로 원래는 불교였으나 도피 생활 중 개종한 것으로 자서전에 소개했습니다. 목사 안수까지 받았으나 이후 면직되며 자리를 잃게 됩니다.

(여담으로 목사는 한 번 면직되면 평생 복귀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고향 (출생지) 인천 송현동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와 함께 대전으로 이사했습니다. (이근안 학력) 이후 한밭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동고등학교로 진학해 서울로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공군으로 군대를 다녀왔고 1960년대 초 부인 신옥영 씨를 만나 결혼합니다.

 

신혼 초 종업원을 여러 명 둘 만큼 크게 미용실을 운영했지만 이 씨가 고속승진을 하며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자 정리합니다. 공군기술교육단 사령부 감찰감실에서 복무한 경험 덕분인지 경찰 재직 중 박중령, 불곰 등의 별명을 얻고 많은 범죄자들을 소탕하며 실적을 쌓았습니다.

 

이후 1972년 대공분실 형사로 발령받고 여러 유공으로 이듬해 경장 특진, 1976년 경사 승진, 1979년 경위로 승진합니다. 그리고 치안본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발령받으며 여러 영화에 나오는 사건들을 맡게 됩니다.

 

이근안 수상

  • 1986년 옥조근정 훈장 (2006년 박탈)
  •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 1979년 청룡봉사상 (조선일보)

 

옥조근정훈장의 경우 무사고 근속 33년을 채우면 수여합니다. 하지만 당시 경력 33년을 채우지 않았지만 유공이라는 명목으로 정권이 원하는 수사 결과를 만들어 낸 이유로 표창했다고 이근안 나무위키 내용에 있습니다. 간첩 검거 등 국가 안보 기여 명목으로 4개의 유공을 포함해 16번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근안 가족 (아들 아내)

부인 신옥영 씨와 슬하 아들 3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근안이 11년의 도피생활과 7년의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 역시 몰락하게 됩니다. 결혼 초기에 미용실을 운영했던 아내는 기술을 살려 다시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집니다.

 

장남은 일반 회사원이었으나 아버지 이야기가 알려지자 주위 시선으로 결국 사표를 냈따고 합니다. 이후 사업을 했으나 잘 되지 않아 왕래가 거의 끊어졌다는 소식이 당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차남은 지병으로, 셋째는 2011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큰 며느리는 과거 대전에서 유치원 선생님을 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둘째 며느리는 미용실에서 시어머니 조수 노릇을 하며 집안 살림을 하고, 10년이 넘도록 집에서 숨어 지내는 시아버지를 위해 점심을 차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이근한 씨는 자신의 업보로 가족들에게 불행이 닥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시절엔 애국이었지만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자 모든 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와 가족의 말로는 참 비참합니다. 근황 소식은 어떨까요?

 

이근안 근황

민주화 운동가들을 고문하며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전직 경찰관 이근안에게 국가에 33억 60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2024년 7월 19일 나왔습니다.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한 금액을 책임져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라고 합니다.

 

국가가 이근한 상대로 제기한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 재판 변론에 나서지 않으면서 정부가 청구한 33억여 원이 그대로 인용되었습니다. 김제 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은 1982년 전북 김제 농부 최을호 씨가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뒤 조카 2명(최낙교, 최낙전)을 포섭해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입니다.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소속이었던 피고는 구타와 고문으로 이들의 허위 자백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최을호 씨는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었고 최낙교 씨는 구치소에서 사망, 최낙전 씨는 출소 후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이후 2017년 6월 재심을 통해 고 최을호 씨는 무죄가 확정돼 누명을 벗었고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국가가 유족에게 114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이에 정부는 이근안을 상대로 손해배상금을 부담하라며 구상금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근안 목사 파면

10년이 넘도록 도피 생활을 하며 성경을 5회독이나 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탐독하며 기독교에 귀의하고 출소 후에도 신앙생활에 몰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자신은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의 삶을 신앙에서 찾겠다고 했습니다.

 

2008년 이근안 목사 안수를 받으며 겸손하게 선교하겠다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면직도 감수하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고 말하며 자신의 고문을 정당화하는 모습이 언론 보도되며 논란이 빚어졌습니다.

 

거기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김근태 씨가 세상을 떠나며 기독교계 시민 단체들과 내부에서 말이 나오며 목사안수 철회 서명운동이 벌어집니다. 결국 2011년 1월 1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교단이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며 그의 목사직 면직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근황

목사 생활 동안은 전국을 다니며 신앙 간증으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이후에는 당시 70이 넘은 아니 신 씨가 낮에는 빌딩청소, 밤에는 폐지와 재활용품을 수거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2021년에는 받지 못한 퇴직금을 달라며 소송을 했지만 패소한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법원은 도피 생활로 은행에 못 간 이 씨 책임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도피 중 아내가 퇴직금을 받으려 한 점을 근거로 정부가 알려주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고 보고 청구 시한이 5년이 지났다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아내 신영옥 씨가 요양원에 입원해 홀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근황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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